설립자 오수영 히지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Founder , Fr.Soo- Young Hyginus John Mary Vianney Oh
오수영 신부님께서는 1938년 5월 13일 인천 남구 만수동 733번지 가난한 농가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셨다. 부모님의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아 착하고
부지런했던 신부님은 소년 시절부터 동네 꼬마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병아리를 키워 판 돈으로 불쌍한 이웃을 돕는 등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오봉환 요셉)는 그의 착한 성품을 보고 곧잘 “배창시(‘창자’의 경상도 사투리)까지 빼 줄 놈”이라고 하셨다. 어머니 (이봉순 마리아)는 병환 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장사와 농사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 가면서도 언제나 남에게 베푸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 주셨다.
짓고 있던 농사마저 장마에 휩쓸려 내려가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려워진 오수영 신부님께서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59년 2월 군에 입대, 밀양 15 육군 병원 위생병으로 근무했다. 그때 한 장교가 순하고 부지런한 신부님을 보고 ‘암소’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밀양에서 군 생활을 하던 오수영 신부님께서는 부산에 사는 고모 (오봉연 루치아)씨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에 입교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모는 조카 수영이군에서 세례(세례명-히지노)를 받자 영성에 도움이 될 만한 신앙 서적들을 많이 보내 주었다. 청년 오수영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쁘게 복음을 전하는 군종신부를 보면서 거룩한 사제직을 동경하게 된다.
한 청년이 새벽마다 성당에 나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친 후 냉골처럼 차가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슬그머니 방석을 내밀었지만, 그는 방석을 다른 쪽으로 밀어 놓고는 계속해서 기도에 몰두했다.”(차 엘리사벳 자매 회고담)
오수영 신부님께서는 1964년 26세의 늦은 나이에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 혜화동 가톨릭 대학교에 입학했다. 뒤늦게 시작한 신학교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잠을 줄여가면서 어린 학생들보다 더 노력했지만, 라틴어 과목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평소 몸이 약했던 그는 라틴어 공부 때문에 신경성 위염까지 심하게 앓았다.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그는 급기야 신학교를 쫓기듯 나와야 했다.
무참히 부서진 사제의 꿈. 그는 좌절감을 달래기 위해 틈만 나면 남산에 올라가 멀리 보이는 혜화동 신학교 교정의 성모상을 향해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성모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느님께 저를 봉헌하고 싶습니다.”
부산 아미성당에서 약 1년간 사무장 겸 전교 회장으로 일하면서 주임 신부인 고 신부님을 도왔다. 그리고 밤에는 사제 성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그의 입학 추천서를 써 준 장대익 신부님께서는 브라질 교포 사목에서 돌아와 오수영의 학업 중단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이런 진국 같은 청년이 사제가 안 되면 누가 사제가 되냐”며 신학교에 찾아가 복학을 요청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다른 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부산으로 내려온 오 신부님은 빈민 구제 사업을 하는 하 안토니오 신부님과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일을 거들면서 신학교 입학 준비를 했다. 이때 신부님은 가난한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국땅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들을 위해 땀 흘리는 두 외국인 신부는 오수영 신부님에게 사제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미리 제시해 준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오 신부님은 광주 대건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지만, 연거푸 두 번이나 낙방했다.
사제의 꿈을 포기하려는 신부님에게 하 안토니오 신부님께서 격려하며 말씀하셨다. “좌절하지 마십시오. 히지노. 하느님이 히지노를 더 좋은 신부, 더 큰 신부로 만드시려고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다시 용기를 내어 세 번째 시험에 도전, 드디어 1969년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신부님은 신학교에서 동급생보다 거의 10년이나 나이가 많아 ‘오 영감님’ 이라고 불렸지만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하면서 악착같이 수업을 따라갔다.
그토록 멀고 먼 길을 돌아 다시 신학교에 입학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나를 특별한 방법으로 쓰시기 위해 그렇게 고생길을 걷게 하신 후에 이 자리에 데려다 놓으신 것 같다.”는 믿음을 갖고 학업에 열중했다.
부제 오수영은 성 프란치스코 등 영성 대가들의 책을 즐겨 읽었다. 또 기도로 참된 사제 상을 세우자는 취지에서 나이 든 신학생들끼리 모여 함께 기도하고 성모님께 봉헌하면서 묵주의 기도를 열심히 바쳤다.
1975년 7월 5일 부산 교구 중앙 성당에서 38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은 오 신부님은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께서 건강만 허락해 주시면 미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봉헌했다. 1975년 7월 6일 부산 동항성당에서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 했다.
오 신부님은 울산 성당에서 현대 조선소 신자 근로자들이 밤낮없이 일하느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을 보고 주 3회 산업 현장에서 야외 미사를 집전했다.
처음에는 13명의 근로자가 참례했지만 2년 동안 미사가 계속되면서 그 숫자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야외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2년 동안 놀랍게도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유신 정권 시절, 오 신부님은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에 합류해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신부님은 ‘3.1 민주 구국 선언’사건(1976.3.1.)으로 수감 중인 김대중의 옥중 서한을 배포하다 체포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8년 2월 당감성당에 부임한 오 신부님은 신설 본당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부산 ‘생명의 전화’ 이사를 맡아 김동수 박사, 김정관 목사 등과 함께 봉사 활동을 벌여 나갔다. 이 활동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신부님은 ‘생명의 전화’에서 상담하면서 기도와 사랑뿐만 아니라 교육 심리학 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아대 교육 대학원에 입학, 2년 6개월 간 공부한 후 46세의 늦은 나이에 교육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대 교육 대학원 수료 1983.2.25.)
1983년 2월 초량성당에 부임한 오 신부님은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성당에 지속적인 성체 조배실을 꾸몄다. “지금도 그렇지만 잠시도 한가하게 쉬는 법이 없어요.
직접 못과 망치를 들고 성당 이곳저곳을 다니며 손질을 하고 또 마당을 쓰는 등 잠시도 앉아 있을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때에 식사를 한 적이 없어요.
”(사제관에서 오 신부를 도와주던 고모 오봉연 씨의 회고담).
오 신부는 이때 혼자 힘으로 행려자들을 보살피는 박 베드로 형제를 도와주면서 사회 복지 사업에 눈을 떠 가기 시작한다.
1986년 2월 오 신부님이 동항 성당 주임으로 부임한 지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3명의 가족이 성당에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한 김 비오(55) 형제와 그의 어린 두 아들,
오 신부는 굶주리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사제관에 맞아들여 허기진 배를 채워 주고 지친 몸을 쉬게 했다.
빈민과 결손 가정이 많았던 이 지역에 오 신부의 선행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병든 엄마와 5명의 자녀, 밥을 굶고 있는 노인들, 오갈 데 없는 출소자,
알코올 중독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오신부의 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지적 장애인을 사제관 앞에 버리고 간 사람도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자 오 신부는 일단 성당 한 귀퉁이의 10평 남짓한 창고에 방 3칸을 만들어 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워 주었다.
초라한 창고를 개조해 만든 ‘오순절 평화의 집’.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보금자리 '오순절 평화의 마을'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순절 평화의 집’ 문을 여는 1986년 8월 3일, 오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냉대받는 가운데 갈 길을 몰라 헤매는 하느님의 어린양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국민 모두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오 신부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사랑과 나눔의 봉헌 생활을 통해 오순절 성령강림의 놀라운 기적을 함께 재현할 협력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하느님은 이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 신부에게 협력자를 보내 주셨다.
하느님의 비천한 종이 되어 살겠다는 미혼의 자매들이 한두 명씩 모여 공동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성령강림사도수녀회는 이처럼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 마음 가난한 이들이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
오수영 히지노 신부님께서는 수도명을 히지노 요한 마리아 비안네로 불리기를 원하셨다. 1970년대 후반 한국 가톨릭 성령쇄신 운동의 일환인 성령 세미나에 참석하여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체험한 후 시대적 사명을 깨닫고, 시대적 요청과 주님의 뜻에 응답하시고자 1986년 8월 15일 성령강림사도수녀회(구-오순절 평화의 수녀회)를 설립하셨다.
찬미와 감사, 나눔과 섬김의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공동체의 정신을 이 시대 새롭게 구현하고자 하는 수녀회를 설립하셨던 신부님께서는 언제나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시며, 세계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기도와 나눔을 실천하셨다.
예수 성심과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각별한 신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시며 수도자들에게 매일의 수업과 함께하는 기도와 노동을 통해 수도회의 설립 영성을 깊은 기도와 사랑으로 전해주셨다.
프란치스코 재속 3회원으로서,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강조하시며, ‘주님! 저를 당신 평화의 사도가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사제서품 때 모토로 삼으셨고,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를 자주 바칠 것을 권고하셨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주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곳에 한평생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셨던 신부님께서는 성령 세미나와 기도회, 강연과 저술 활동으로 성령안에서의 치유와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온 열의를 다하셨다.
영적 성장을 위해 진실한 생활과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합시다.
본회 규칙 준수와 복음적 삶을 통해 수도자의 모범이신 성모님의 모습처럼 삽시다.
이 세상은 너무나 자존심과 똑똑함, 교만함 때문에 가정과 이웃과 공동체와 세상이 파괴되어 갑니다.
우리 모두 마음이 양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삽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 아닌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합시다. 이제 우리 마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비우고 또 비워 주님 사랑의 영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정화가 필요합니다. 즉 우리 의지의 정화, 지성의 정화, 기억과 상처의 정화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안에서 변화되도록 내맡겨야 합니다.
정화된 우리는 사랑하는 데 자유롭게 됩니다. 정화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살아가는데 각 개인의 삶의 모습은? 우리 시선은 어떤 것인가?
교만과 이기심의 시선인가? 파괴적인 시선인가? 유혹의 시선인가? 이해 부족과 질책의 시선? 분노와 시기의 시선은 아닌지...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웃과 사회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이기심, 자애심, 계산하는 자세는 제쳐 놓아야합니다. 너 자신의 뜻대로 하고 나면 불행과 괴로움과 쓰라림에 잠기기 쉽습니다. 네 자신의 뜻을 비워야 합니다. 제 뜻을 태워 없애 주십시오. 하느님의 뜻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제 뜻(이기심)을 몰아내시어, 하느님 뜻의 씨앗이 제(우리) 안에서 싹트게 하소서!
한 번 쓰세요. 마음에. (2004.1.16. 여주 분원에서 ‘수도자들에게 쓴 편지’ 중에서)